수록작의 면면을 볼 때..이 책은 분명 하드 SF로 분류되지만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사뭇 살내음 나는 '양육과 애착 형성'인 듯하다. 그는 시종일관 인공지능의 딥 러닝에 회의적 관점을 갖고 있는데, 나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한 존재를 키워내는 것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고, 적어도 수십 년의 품이 드는 일이라고. 매 단편마다 날카로운 의문점을 던지고, 그것을 매우 묵직한 문장으로 끝맺어서 잠시 눈을 감고 여운을 즐겼다. <옴팔로스>는 창조론에 과학이 대답하는 가장 명쾌한 방법이며 <숨>은 태양계 밖으로 보내고 싶은 메시지였다.

<숨>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매우 좋았다. 독서 중에 잠시 벅차올라서 책을 가슴께에 얹고 하아..호흡을 가다듬는 순간을 좋아하는데, 유독 그런 순간이 많았던 책이었다. 테드 창은 명성에 비해 저서가 적은데, 이런 밀도라면 그럴 만하겠다 싶었다. 수록작 중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숨><거대한 침묵><옴팔로스>가 좋았다.

<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 책의 전체적인 톤 앤 매너가 표지 디자인의 느낌과 비슷하다. 뇌과학 이론은 개괄적으로 설명되고, 주요 내용은 저자의 커리어와 연애를 다룬 에세이. 크게 인상에 남진 않았다.

마지막 수록작이었던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는 매우 확연하게 실제 사건..세월호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 느껴졌다. 재난이 찢어놓는 사회와 커뮤니티들의 변화. 그 와중에 모든 시선에 보편적 연민이 느껴졌고, 그래서 좋은 SF라는 생각을 했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제법 즐겁게 읽었다. 표제작인 첫 단편은 '승각 장애'라는 개념을 제안한 게 신선했지만 아주 많이 와닿지는 않았다. 이 책의 수록작들은 모두 여성들이 주도하는 이야기인데, 감정묘사가 과잉된 부분들은 내게 조금은 벅찼다(나쁜 의미로)..매 단편마다 제안하는 개념들이 신선했는데 특히 <홀리 아이언 메이든><싱귤래리티 소비에트><빛보다 빠르게, 느리게> 이 3편이 좋았다.

<사소하지만 쓸모있는 뇌 사용법> so so...저자가 유머러스함을 장기로 내세우는 타입 같았는데..불란서 유머 감성은 나에게 좀 투머치하다는 생각만. ㅋㅋ 뇌에 유익한 음식을 소개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접근성이 좀 떨어지는 재료들이 많았다. 그래도 마인드셋에 관한 글들은 유익.

<천 개의 파랑> 꾸준히 추천받아온 책이고 도서관에서 빌려올 당시 책 표지가 너덜너덜해져 있었기 때문에..꽤 기대했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좋은 이야기였지만, 결말은 큰 울림이 없었다. 아마 작년 즈음부터 내가 안온..무해..다정..어쩌구들에 꽤 싫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책의 집필에 앞서 '기질이 양육을 압도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삶이 그 가설을 정통으로 부정함으로써 계속해서 도전받게 되었다. 책이 마무리되는 순간까지도 저자는 본인의 지론을 뒤집지는 않았고, 견해는 여전히 잘 봐 줘도 50:50정도로 보인다. 뇌과학이 아직 갈 길이 머니 유보하는 입장인 듯한데..읽는 나도 다소 고민해보게 되었다. 사이코패시가 유발되는 기질적 요인에 대해서도 꽤 자세하게 적혀있기 때문에.

당연하달 수 있겠지만 저자는 이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성장 과정에서 품었던 여러 갈등과 의문이 풀리는 열쇠였던 듯하다. 그리고 연구자이기에 앞서 아들과 남편, 아버지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담담하게 늘어놓는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사이코패스가 미디어에서 낭만화되는 것을 경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이 그 낭만화에 더 일조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지나치게 솔직했기 때문에 책 전반에 감도는 자아도취를 도저히 숨기지 못했다. ㅋㅋ

<사이코패스 뇌과학자>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알던 여자친구와 결혼해 자식을 여럿 낳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구가하는 뇌과학자. 그가 랜덤 뇌 스캔 사진을 늘어놓고 살펴보다 확연한 사이코패시의 패턴을 가진 뇌를 발견하고, 그게 자신의 뇌를 스캔한 사진이라는 걸 깨닫는다. 자신이 연구해 온 반사회적 범죄자들과 거의 동일한 뇌 구조를 가졌으면서도, 어떻게 자신은 범죄자가 되지 않은 걸까...